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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아리랑'의 아주 특별한 인연을 소개합니다.

M K H SOUND 2013. 10. 8. 19:08


 6·25와 ‘아리랑’의 아주 특별한 인연

 

6·25 때 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아리랑’의 재즈 버전

‘아-디-동 블루스’를 아십니까 (AH-DEE-DONG BLUES) ???

 




 ▲ Click LP Record

 


‘사발 그릇이 깨어지면 두세 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 된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강원도 산골 정선 할머니들이 부른, ‘38선 아리랑’의 가사다. 

아마도 해방 후 좌우 대립이 시작된 시기부터 불려온 사설일 것이다.

 

어떤 시인이 있어 이토록 소박한 논리로, 나직한 목소리로 통일의 당위성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아리랑’은 이렇게 외세가 그어 놓은  38선을 일찍부터 깨뜨려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렇지 못할 때 더 큰 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한 것이 아리랑의 숙명이었다.

아리랑의 그 숙명은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된 6·25 때도 그대로 이어진다.

전장에서는 군가나 의식음악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휴식을 돕고 향수를 달래기 위해 진중가요와 함께

원초적 정서를  자극하는 민요도 긴요하게 쓰인다.

이들 노래는 때론 적군 사기를 떨어뜨려 전투의지를 꺽는 심리전 도구로 돌변한다.

 

유감스럽게도 7,000만 민족이 즐겨 부르는 민요 아리랑이 그랬다.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인민군에게는 심리전 무기로 쓰였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6·25 당시 전선의 소식을 전하는 한 신문(조선일보, 1951년 1월12일자)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100%’


-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고 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중부전선에서 있었던 사실이다.

그러나 중부전선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본시 아리랑은 여말선초(麗末鮮初)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복해 

 

강원도 정선에 은거하던 절의신(絶義臣)들과 그 영수였던 목은 이색(李穡) 등이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고 한시로 애소(哀訴)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듯 아리랑은절의와 저항의 노래로 태어나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의 주제가로 쓰이면서 항일, 민족의 노래로 재탄생한다.

 

이런 역사성과 위상을 지닌 아리랑이 동족 간에 전혀 다른 목적과 기능으로 쓰였다.

 

 

 

 

 

 

 

 

▼  인천상륙작전 승전 기념품도 ‘아리랑’ 악보


그런데 이 아리랑은 6·25 때 또 다른 의미로도 쓰였다.

6·25 때 미군과 국군은 세계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대모험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그 작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그 결과 서울을 수복한 것은 물론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할 수 있었으니,

남측으로서는 인천상륙작전이 6·25 최대의 전승 기록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념하지 않을 수 없어 그 주력 부대인 미 7사단 사단장에게
 
치하와 함께 기념품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승전 기념 선물이 아리랑이었다.

이부란(프란체스카) 여사가 전통 자수방식으로 수놓은 아리랑 악보와 가사였던 것이다.

 

이후 1956년 다시 김흥산(金興山)이 행진곡풍으로 편곡한 악보가

W. 켈러웨이 사단장에게 전달돼 미 7사단의 정식 군가로 채택되고,

이는 다시 사단가인 ‘대검가’(大劍歌)  아리랑 곡조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6·25는 아리랑을 참으로 특별한 의미의 노래로 변신시킨 것이다.

 

6·25 당시 이 같은 아리랑의 쓰임새가 최고의 빛을 발한 것은 휴전회담과 포로 교환 때였다.

 

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과 이에 따른 단계적 결실 중 하나였던,

포로 교환이 있을 때 양측 가운데 한 곳에서는 반드시 아리랑을 연주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회담 조인식에서 벌어졌다.

 

 

 

 

 

 

 

  ▼  휴전회담 조인 직후 울려퍼진 ‘아리랑’ 


알려진 바대로 남측은 이 휴전회담에 참석하지 못했다.

2년 간의 휴전 줄다리기와 3년1개월의 전쟁을 중지하는 역사적 회담 조인식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그리고 중공군 대표만이 전쟁 당사국으로서 서명한 것이다.

 

웃음은커녕 악수나 박수도 없이 한글로 된 정본과 영어·중국어본 협정서에 서명하고,

양측 대표들이 동서 양쪽 문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 조인식은 끝났다.

아무리 전쟁의 뒤끝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쓸쓸하고 씁쓸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양측 대표가 각자 문을 나서는 순간 이런 분위기를 일시에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도열해 있던 양측 군악대가 대표들의 사열을 받으면서 동시에 주악을 연주했는데, 연주곡이 남북 똑같이 아리랑이었다.

 

서로 약속한 바도 없었는데 그 중요하고 엄숙한 순간 양측 모두 아리랑을 연주했다는 것은

바로 아리랑이 민족 전체의 노래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비록 휴전회담의 형식은 반쪽이었지만, 그 최종 의식(儀式)에서

아리랑을 통해 ‘민족적 통일’을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6·25는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실로 6·25전쟁 덕에 세계에서 가장 단시간에 가장 많은 국가에 전파된 우리의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쟁은 말 그대로 교류의 장일 수밖에 없다. 이 땅의 6·25도 마찬가지였다.

6·25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16개국이 참전해 남한을 도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북한 역시 러시아의 배후 지원을 받았고, 중국은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직접 전장에 투입했다.

그러니 6·25는 20여 국에 달하는 사상 유례없는 인종과 문화가 대규모로 교류한 전쟁이었다.

 

당시 참전 유엔군을 위문하기 위해 세계적인 연예인들이 대거 한국을 방문했다.

특히 유엔군의 주력이 미군들이어서인지 웬만한 미국의 연예인들은 대부분 한 번 이상 방한했다.

배우 마릴린 먼로,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 코미디언 밥 호프 등 300여 명의 미국 연예인이

한국을 찾았던 것으로 한국전쟁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는 뮤지션들도 끼어 있었다.

 

그것은 이 땅을 팝(pop)음악의 세계적 시장으로 변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지만,

대신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이들에 의해 세계에 전파될 수 있었다.

또한 참전한 20여 국 군인들을 통해 그들 나라에도 아리랑은 퍼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아리랑은 ‘전쟁과 고아의 나라’의 상징처럼 부정적으로 인식된 경우도 있었지만,

의외로 음악성을 인정받는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해 세계적 수준의 노래로 전파된 예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 예 오스카 페티포드 (Oscar Pettiford) ‘아 디 동 블루스’(AH DEE DONG BLUES) 다.

 

오스카 페티포트는 당시 재즈계의 신화적 인물로, 1951년 위문공연차 인천에 잠시 기착했다.

그때 우연히 아리랑을 접하고 직접 편곡, 연주해 재즈 전문 레이블인 ‘로열 루츠(ROYAL ROOST)사를 통해

1952년 SP 음반으로 발매함으로써 탄생한 재즈 버전의 새로운 아리랑이 ‘아 디 동 블루스’였던 것이다.

 

 

 

                                                                                             출처 : 2004년 월간중앙 6월호 특집